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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nda

Da Capo

 

 

 

 


 
 
 
"그리하여, 이 힘든 역경 속에서도 졸업 축하드립니다. 2024 졸업반 여러분."
 
교감 선생님의 선언은 공허했다. 생존했고, 또 이렇게 졸업했으나 아무도 박수치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다. 믿기 힘든, 거짓말 같았던 며칠이었다. 그 마지막 날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상황이 하나하나 선명했지만 말이다.
 
 
 
그곳엔 우리가 있었다.
동전을 던져도 세 번에 한 번은 뒷면이 나올 텐데, 단 한 번도 우리의 손을 들어준 적 없던 확률. 갑작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 후회와 무력감, 좌절과 절망. 이루어지지 않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괴로움과 외로움에 굴러떨어져도, 살아남으려 추하게 발버둥 치던 자신이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온몸을 적시다 못해 숨통을 틀어막던 눅눅한 감정이 잊히지 않는다.
 
 
떠올리면, 마지막까지 쉬운 것 하나가 없었다. 옥상까지 달려 올라가는 동안 발목을 붙들렸고, 올라가 문을 막는 동안에도 기어들어 온 좀비 녀석과 대치해야만 했던 것이 생각났다. 니나가 이젤을 부러뜨려 만들어준 나무막대와 린이 찾아준 대걸레가 부러지도록 휘둘렀다. 그리고, 물렸던가. 더럽게, 정말 더럽게도 아팠다. 여전히 흉터가 남은 걸 보면, 아마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지도 몰랐다. 한순간, 그동안 물렸던 애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지 말걸, 그런 후회를 했었다.
 
어떻게 좀비와 싸우고, 이겨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은 흐렸고, 몸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통제를 잃었다. 물고 할퀴는 공격에 당했던 상처와, 넘어지고 부딪쳐 성한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어이 좀비를 쓰러뜨렸다. 아마도 살고자, 살아 남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아드레날린인지, 정신이 나갔던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통증은 휘발되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어떤 희생을 넘어왔는데,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는 광기였으리라.
 
 
이후부터는 기억이 조금 흐릿하다. 아마 부상 탓이겠지. 시야는 흐렸지만, 소리는 선명했다. 몇 번이고 불발됐던 폭죽이 마침내 터졌다. 그 후 거의 곧장,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던 라이트가 따라왔었다. 옥상 문이 닫히고, 모두가 안도했던 순간에 들리는 총성은 날카롭게 공기를 찢어놓았던 것 역시. 기억났다. 그 총성이 누구를 노렸으며, 흐릿하게 쓰러지던 인영이 누구의 것인지. 보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아,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영영 돌아오지 못할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던가. 상처가 아프단 생각을 했던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했던가. 흐무러진 정신 속에서, 군인과 친구들의 모습이 마구 뒤섞였다. 잔뜩 일그러진 형상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선명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가, 누군가에게 기댔던가. 어쨌거나, 살아서 헬기에 올랐었다.
 
생존자, 사망자, 신약, 걱정하지 말아요. 토막 나 떠오르는 말들이 떠오르지만, 전후 맥락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가물가물한 정신을 일깨우던, 커다란, 너무나도 커다란... 폭발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건물과 좀비를, 그곳에 두고 온 시간을, 영원한 열여덟의 아이들을. 기억은 거기서 끊긴다. 암전. 침묵. 끝없이 이어지는, 채워질 수 없는 간극. 학교는 그렇게 사라졌다. 우리는, 우리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보낸 며칠은 몇 달이라도 되는 것처럼 길고, 끝없이 이어졌는데. 이후의 시간은 겨우 하루 내지는 며칠인 것처럼 쉽게도 지나갔다. 제 속에 시간을 쌓지 못하고, 그저 흘려보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흘렀다. 테스트 중이라던 치료제를 제때 맞을 수 있어서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 어깨는 전처럼 쓸 수 없을 거라는 것. 심심찮은 위로금이 지급되리라는 것. ...그 어떤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이 폭파되어 다니던 고등학교가, 사태가 일어난 LA 전역이 재건에 들어가야 한다는데. 우리는 졸업식을 제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기다리던 사람 대신 종잇조각이나 다름없는 돈이 유족에게 떨어졌는데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말이 있을까. 망가진 것은 절대, 결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짓고, 상처를 치료하고, 기억을 덮어간다 하더라도.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서서히 마모되어 간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는 없다.
 
 
"여러분의 앞길에 축복만이 있기를."
 
 
지워지지 못할 얼룩처럼, 우리의 시간엔 검은 잉크가 쏟아졌다. 이후의 발걸음마다 검은 자국을 남길 잉크에, 두 발목이 푹 적셔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아니, 내가. 나아갈 수 있겠어? 축복을 받을 수 있겠어. 그렇게 살아 남고자 했으면서도, 홀로 무거운 하루를 떠받치고 서 있으면 감춰지지 않는 절망이 스스로를 좀 먹는다. 꿈도, 계획도, 목적도 없는 삶은 표류한다. 흐름을 타고, 멋대로 흘러갔다.
 
 
어떤 기억은 영영 떨쳐낼 수 없다.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고 싶다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혼마저도. 운명을 비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 저녁.
학교 앞에 서 있다.

 
오늘도 활기찬 글렌필드 고등학교!
 

난 운이 좋은 편이야, 루시아.
 

프롬을 앞둔 오늘, 학생들은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습니다.
 

네 전시회를 봐야 하거든, 테사.
 

곧 있을 프롬 파트너를 구하러, 운동부가 늦게 끝나서, 친구랑 노느라, 아니면 데이트라도 하느라!
 

너에게 사과도 못 했거든, 거스.
 

어쩌면 이번 프롬이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청춘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불타오를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바보여서 미안해, 헤일리.
 

그렇다면 오늘도, Go Glenfield!
 
 

그래도 너희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다시.
D.C.
 
 
 
 
 
 
 
 
 
 
 
 
 
 
 
 
 
 
 
 


 
 
 

 

어떤 시간의 기록

1회차의 기록

[헤일리가 죽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2회차의 기록

[거스와 헤일리를 살렸으나... 다른 친구가 희생됐다. 테사는 여전히 같은 선택을 했다. 무언가가 달라져도, 모두를 구할 순 없었다. 더 잘할 수 있을까?]

 

3회차의 기록

[너무 대놓고 수상하게 굴었나 봐. 나는 위험 분자로 보인 것 같다. 생각보다 이르게 무리에서 배제되었다. 함께 행동할 수 없으면 행동에 제약이 너무 많다. 다음번엔 더 조심해야지. 다음엔, 다음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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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차의 기록

[지나온 시간이 많이 쌓여서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처음의 거리감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뭔데 친한 척하냐며 한 소리 들었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흘렀다. 아직 눈물이 나는 것이 신기해서 웃었더니, 질색하던데. 신선한 반응이었다. 다음엔 더 잘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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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차의 기록

[구조 헬기가 오는 날짜가 미뤄졌다. 그만큼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뭘 잘못하고 있는 거지? 잘못을 계속 수정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하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바꾸면, 달라지는 것이 있어도... 결말은 같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것도 같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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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회차의 기록

[단지 다 같이 살고 싶다는 것뿐인데, 몇 명의 목숨을 구하려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안 될 일이야? 다 망했어, 망쳐버렸어. 웃음도 나오지 않아. 이젠 애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아. 내 말을 듣긴 해도, 나를 믿지 않아. 신뢰하지 않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아. 관성이 되어버린 걸까? 다시 시작한다는 것, 언제부터 이렇게 쉬워졌지? 나는 지금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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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회차의 기록

[어떤 일들은 정해진 것처럼 일어난다. 이를테면 건물에 들어온 다음 날, 다 같이 1층에 있거나 2층에 있어도 누군가 하나는 꼭 물린다는 것과 같은 일. 그리고 동전 세 번을 던져도 모조리 앞면만 나온다는 사실. 단 한 번도 달라지지 않는 일들이 벅차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 정말 있는 걸까? 내가 무의미한 일을 하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젠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 너희를 살리기 위해, 너희를 버리는 게 되더라도.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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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회차의 기록

[아무도 의지해선 안 돼. 기대지 마. 그들에게 너라는 무게를 싣지 마. 내가 이 아이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지옥 속으로 몰아넣은 거야. 정신 차려. 놓지 마, 잃어버리지 마. 잊지 마.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마. 더 나아질 수 없었을까. 그것만 생각해. 선택과 집중. 내가 너희에게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직, 아직은. 희미하더라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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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회차의 기록

[오늘, 옥상에 도착한 것은 나 혼자였다. 왜라는 말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삐걱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느꼈으니까. 너희를 좋아하지 말걸.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지 말걸. 너희를 몰랐다면, 이렇게 외롭고 그립지 않을 텐데. 내가 언제의 너희를 그리워하는지도 이젠 모르겠다. 나는 누굴까. 무엇이지? 더는 무리다. 지쳤어. 너무 욕심을 부렸기에 벌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어.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누군가 받아야만 하는 형벌이라면, 내가 받은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은 나의 오만인가?]

 

 

 
 
 
 
 


 
 
 
300회차의 기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이 마지막. 미안해. 그래도 이번엔 성공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활기찬 글렌필드 고등학교!
프롬을 앞둔 오늘, 학생들은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습니다.
곧 있을 프롬 파트너를 구하러, 운동부가 늦게 끝나서, 친구랑 노느라, 아니면 데이트라도 하느라!
어쩌면 이번 프롬이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청춘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불타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탕―!

 
 
 
 

Go Glenfield!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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